"악역이라고 말하지만, 악역이 아닌 샬럿"
"이상을 추구하는 밝은 에너지 닮아"
"휴식기 마음 돌린 아름다운 음악"
[뉴스컬처 윤현지 기자] 누군가의 길잡이가 되어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누군가는 의문을 품을 수도 있고, 원치 않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뮤지컬 ‘브론테’의 샬럿은 악역을 자처하면서도 자매의 길잡이가 돼 주었다. 그것이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뮤지컬 ‘브론테’는 여자가 글을 쓰는 것이 허락되지 않던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가난한 목사의 딸로 태어나 죽음과 병이 더 가까웠던 우울한 삶이었지만, 그 속에서도 이야기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샬럿, 에밀리, 앤 브론테 자매의 삶으로부터 출발해 상상을 더해 만든 뮤지컬이다.
브론테 자매들 중 살아서 인정받은 유일한 작가이자 ‘제인 에어’, ‘빌레트’ 등의 대표작을 남긴 샬럿 역의 강지혜, 이봄소리, 허혜진 배우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쉴 새 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서로를 향한 칭찬을 아끼지 않는 세 사람은 단연코 극을 이끄는 ‘햇살’ 그 자체였다.
‘브론테’의 샬럿이라는 캐릭터를 구축하며 가장 중점에 뒀던 부분은 어디인가.
강지혜(이하 강) 모든 작품을 할 때 제일 중점에 둔 부분은 스스로 생각해낸 것보다 연출이 보여주고자 하는 목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성격을 입혀야 겠다는 것보다 가장 기본적인 걸 생각한다. 이 씬에서 뭘 보여줘야 하고, 어떤 감정이어야 하는지 분명하다면 인물이 명확해지는 것 같다.
이봄소리(이하 봄) 작가와 연출과 이야기를 정말 많이 나눴다. 그래서 초반에 걱정됐던 것이 세 자매가 다 사랑스러워 보여야 하는데 샬럿만 사랑을 못 받을까 걱정했다. 그런 시기가 있었지만 작가와 연출이 ‘더 독선적이고 오만해도 된다. 그만큼 뒤에서 반성하는 가사와 대사가 나오니 괜찮다’고 말해주기도 했다.
강 뒤에서 후회를 하는데 앞부분이 제대로 쌓이지 않으면 너무 급하게 들어가는 것처럼 보여 서사가 쌓이지 않고 관객이 공감하지 못할까 봐 걱정했다.
허혜진(이하 허) 착하게만 가면 뒤에서 후회를 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적정선을 찾기 위해 굉장히 노력했다. 스스로 악역이라고 말하지만 결론적으로 악역은 아니어야 했다. 그래서 가사 수정도 굉장히 많이 됐고 감정의 농도가 0%에서 100%까지 모두 시도해봤다.
본인의 실제 성격과 샬럿을 비교해본다면 어떤가.
허 나는 극 초반에 샬럿이 많이 녹아든다. 장난치고 자매들과 격 없이 지낼 때 내가 나오는 것 같다.
봄 나는 연습할 때 모두가 ‘샬럿은 그냥 이봄소리 아니야?’라고 했다. 장면 연습할 때도 ‘그냥 해, 일단 넘어가. 왜 (내가) 너무 독선적이고 오만하니?’ 이렇게 장난치곤 했다. 나는 어떤 목표가 정해지면 가타부타 말을 더 안 붙이고 결과로 가는 걸 좋아한다. 그런 면이 샬럿에게도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나중에 후회도 많이 하지 않나. 나도 후회를 많이 한다.
강 나에겐 독선적인 면이 없다고 생각했다. 배우들 집에 놀러가서 머리끈을 빌릴 때 이미 머리를 묶으면서 ‘이것 좀 써도 돼?’라고 묻는다던가, 물건을 쓰고 제자리에 안둔다든가 하는 행동을 하더라. 배우들이 내 성을 따서 강도라고 부르기도 했다.(웃음)
봄 허혜진 배우는 사람들을 잘 맞춰주는 편이어서 샬럿을 하기 힘들지 않을까 했는데도 강단이 있더라. 샬럿은 이상을 추구하고 밝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인물인데, 셋 다 밝은 에너지를 가진 사람들이 모였다.
형제자매가 있나, 그 경험이 ‘브론테’ 연기에 도움이 되었나.
봄 나는 외동딸이다. 그런데 어릴 때 사촌 동생과 함께 살았다. 그중 내가 맏이여서 동생들 통제를 많이 했다. 사촌 동생이 또래보다 몸집이 작았는데 누가 괴롭히는 걸 발견했다. ‘쟤는 나만 괴롭힐 수 있는데?’하는 마음으로 괴롭힌 친구를 쫓아가서 복수해준 기억도 있다. 그래서 샬럿의 기분을 잘 표현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강 나는 언니에게 거의 업혀 자랐다. 나이는 두 살 차이밖에 안 나지만.(웃음) 학교를 다닐 때 학생 작품 때문에 늘 밤을 새고 그랬다. 그러면 교양 공부를 할 시간이 없어 공부 잘하던 언니가 대신 영어 과제를 해주고 그랬다. 어머니가 어릴 때부터 나쁜 말을 못하게 키우셔서 욕도 안 하면서 자랐다. 하루는 언니랑 싸우다가 험한 말이 나왔는데 서로 너무 놀라서 어머니에게 비밀로 하자고 했다. 누가 누구에게 한 건지 기억은 안나는데 그때 그 말이 서로에게 했던 가장 나쁜 말이었을 거다. (봄 정말 무해하다.)
허 나는 친오빠와 어릴 때부터 팔짱 끼고 다니고, 데이트 가고 그랬다. 비 오면 데리러 오고 밥해주실 분이 없으면 떡볶이집 가서 나눠 먹고 그랬다. 중국 유학 가서도 오빠 여자친구와 함께 데이트를 하기도 했다. 내가 중국어를 못해서. 지금 생각하면 미안하다.(웃음)
다른 역할을 해보고 싶진 않나.
강 리딩 때 당연히 앤인 줄 알았다. 내가 앤 같다기보다는 그런 역할을 많이 해왔어서.
봄 중재하는 느낌이긴 하다. 넘버 ‘찢겨진 페이지처럼’의 장면을 연습할 때 지혜 배우가 없었어서 어떻게 할지 궁금했다.
강 지금 공연 올라간 후 많이 무서워졌다.
봄 아이고 무서워.(웃음) 다른 역할을 한다면 만장일치로 에밀리를 하고 싶어하지 않을까 싶다.
허 나도 평소에 좀 지르는 연기를 많이 해서 에밀리보다 따사로운 느낌의 샬럿을 하게 돼 너무 좋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이제 샬럿을 하다 보니 고음이 제일 많더라. 이건 내 계산과 다르다고 생각했다.(웃음)
봄 연습할 때 다들 에밀리를 부러워했다. 에밀리는 딱 치고 빠진다. 멋들어진 거 다 하고 깔끔하게 하늘로 간다. 그런데 샬럿은 노래는 노래대로 감정을 쏟아내고 대사는 왜 이렇게 많은지. 말을 시작하면 대사가 네 줄이다.(웃음) 앤 인터뷰도 봤다. 앤들의 고충은 인정이다. 그들의 힘듦이 있었다. 하지만 샬럿의 노래도 불러보길 바란다. 샬럿은 전부 다 높은 음이다.
음악 얘기가 나온 김에, ‘브론테’의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어땠나.
허 처음에 ‘브론테’ 제안받기 전에 휴식기를 가지려 했다. 하지만 대본과 음악을 들으니 이건 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졌다. 내가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았다. 주변에서 이게 잘 되면 다음에 또 올 것이고, 이거 하나 안 한다고 삶이 바뀌진 않을 것이다 했지만 한 귀로 흘려서 하게 됐다.
봄 나 역시 음악을 듣는 순간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했을 때 질투 날 것 같았다. 함께 하는 배우도 너무 좋았다.
강 리딩 때 음악을 들었을 땐 초반 다섯 곡만 나와 있었다. 음악이 정말 좋았는데 1년 뒤 후반부까지 듣고 나니 ‘록 뮤지컬인가?’ 싶더라. 작곡가에게 ‘나 못한다’고 말할 정도였는데, 그만큼 신경을 쓰고 고민도 하고 욕심도 있었다. 그 욕심을 낸 만큼 결과물이 좋았다.
가장 좋아하는 넘버를 꼽아본다면.
봄 ‘찢겨진 페이지처럼’ 할 때를 제일 좋아한다. 고음을 크게 낼 때 갑자기 뻥 뚫리는 기분이다. 솔로곡 할 때는 만신창이일 때 힘들다고만 생각하는 것 같고 이 넘버는 공연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샬럿에 이입했구나’를 느껴진다. 넘버를 부르기 전부터 불만이 쌓여있던 상태다. 그래서 노래를 부르는 게 ‘우리가 갈라지더라도 이 말을 해야만 해’하는 심정이다. 그래서 표현하고 나면 속이 시원하다. 그래서 이 넘버를 기다리고 있고 한 방을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샬럿으로 감정이입을 많이 해서 그런 것 같다.
허 나는 반대다. ‘찢겨진 페이지처럼’을 부를 때 정말 속상하다. 소리치고 있는 스스로가 싫다. 해소가 안 되고 날 억누르니까 눌리지 않으려고 애쓴다. 반대로 끝나고 글 쓰고 밴드 음악이 나오는데 거기서 ‘그래, 내가 이렇게 힘들었지만 이게 맞았다’고 생각한다.
봄 나랑 다 반대다. 나는 앞에서 시원하고 그 뒤부터 점점 바윗덩이가 날 누르는 느낌이다.
허 그래서 나갈 때 웃으며 나간다. 그전까진 글을 못 쓴다. 이상한 편지 받은 이후 글을 못 쓰고, 써도 글이 손에 잘 안 잡힌다. 밴드 음악이 나오는 시퀀스 어느 순간부터 글이 딱 써진다. 글을 내고 아이들의 평론지를 보고 다시 꺾이는 거다.
봄 개인 성격도 있는 것 같다. 저질러 놓고 할 말 다 하고 대차게 나왔는데 글을 완성했는데도 ‘이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들고 뒤에도 하나도 안 기쁘고 평가받을 때도 ‘너희가 뭘 알아’라는 생각이다. 그때 ‘난 너희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게 아니야’하고 깨닫는 것 같다. 그런데 자매들 작품 욕먹고 그러면 통쾌해할 수도 있는데 이 감정이 뭔가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다.
강 실제 ‘제인 에어’가 경계를 두지 않았던 인물이다. 여자로서 절제해야 하는 것도 있고 아버지가 훈계하는 말에 대들기도 하고 공상도 많아서 글 쓸 때 제일 자유로웠던 것 같다. 특히 ‘제인 에어’가 나오자마자 베스트 셀러가 됐지만 그 시기에 차례로 가족을 보낸 시기라 마음이 많이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그래서 ‘이상한 편지 리프라이즈’가 제일 좋다. 왜냐면 그 안에서 아이들에게 ‘우리 되게 찬란했다’고 말하고 내가 후회해서 편지를 쓰는 마음도 있고, 무너져 내렸는데 앤과 에밀리를 다시 만나서 이 아이들을 인정하는 이야기를 한다. 이 넘버가 가장 복합적인 샬럿의 면모를 보여주기 때문에 이 곡을 부를 때 감정이 제일 자연스러웠다. ‘시원하다’ 이런 구체적인 감정이 아니라 그냥 흘러나오는 감정이 느껴졌다.
(인터뷰②에서 계속)
뉴스컬처 윤현지 yhj@knewscorp.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