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로 온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콘트라바스'
인간 소외를 그린 박상원 모노드라마
오는 30일까지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공연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콘트라바스'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이 이야기를 무대로 만들면…'이라는 상상을 해보지 않았을까. 맥주와 콘트라베이스(더블베이스)를 옆에 둔 남자가 방 한 가운데 앉아 누가 들어주기라도 하는 듯 떠들어대는 장면을 머릿속에 수없이 그리다 보면 어느새 눈앞에 그 남자가 서 있다.

'향수' '좀머 씨 이야기' 등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독일 소설가인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저널리스트인 아버지 밑에 태어나 오랜 시간 글을 썼지만 좀처럼 이름을 알리지 못했다. 그런 그는 34세가 되던 해, 어느 극단으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게 된다. 그렇게 써낸 결과물이 모노드라마 '콘트라바스'다.

​연극 '박상원 콘트라바쓰' 공연 사진. 사진=박앤남공연제작소
​연극 '박상원 콘트라바쓰' 공연 사진. 사진=박앤남공연제작소

연극은 성공적이었다. 오케스트라 가장 뒤편에 자리해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는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소외된 소시민의 고뇌를 대변했다는 평을 받았고, '우리 시대 최고의 희곡이자 문학작품'이라 불리는 영예를 얻었다. 이후 '향수'가 대중적인 성공을 거둬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일약 스타가 됐지만, 공식적인 자리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로지 글로만 자신을 드러낼 뿐이었다.

그에 비해 무대를 꾸민 박상원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으레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대외적인 인물이다. 시대를 풍미한 '여명의 눈동자' '모래시계' 등의 작품에 출연하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배우로 자리했고, '내 딸, 금사월' '하나뿐인 내편' 등으로 여전히 건재함을 보여줬다.

2020년 초연된 '콘트라바쓰'는 1978년 연극 '불모지'로 데뷔한 그가 '고곤의 선물' 이후 6년 만에 출발선으로 돌아온 작품이었다. 새로운 번역과 윤색을 통해 현대인의 이야기로 탈바꿈한 작품은 음악세션(연주가)의 다채로운 연주, 무용수로 활약한 바 있는 박상원의 우아한 움직임 등이 더해지며 총체적 예술로 선보였다. 

하지만 당시 팬데믹 직격타를 맞은 '콘트라바쓰'는 마음껏 날갯짓할 수 없었다. 이에 2년 만에 재공연을 결정, 지난 공연의 한계점에서 벗어나 한 층 더 진화한 작품을 보여주고자 했다.

연극 '박상원 콘트라바쓰' 공연 사진. 사진=박앤남공연제작소
연극 '박상원 콘트라바쓰' 공연 사진. 사진=박앤남공연제작소

연극은 기울어진 무대 위에 맥주 한 병을 든 맨발의 콘트라베이스 연주자가 나타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국립오케스트라 콘트라베이스 단원인 그는 국가에 소속된 음악가이자 공무원이다.

그는 친근하고 유쾌한 얼굴로 콘트라베이스를 찬양한다. 오케스트라 음악의 지반을 다지는 아주 중요한 악기라고 거듭 강조하는 것은 물론, 자주 사용하지는 않지만 가장 높은 음까지 낼 수 있다며 직접 활을 들고 시연을 선보인다. 그가 찬양하는 말을 내뱉을 때마다 관객은 서서히 악기의 매력에 빠져든다.

매력적인 악기와 안정된 직장. 누군가는 그를 부러워할 수도 있으나 그는 자신의 삶이 만족스럽지 못하다. 나비 넥타이에 턱시도를 입은 모습이 화려한 듯 보여도 오케스트라 가장 뒷 열에 앉아 뚱뚱한 콘트라베이스를 짊어지고 앉아있는 초라한 남자라는 점이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물론 자신 뒤에 팀파니 연주자가 자리해 있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무거운 콘트라베이스 탓에 일어나서 박수에 화답하지 못하는 자신과 비교해, 팀파니 연주자는 단상 위에 올라 당당히 인사를 받으니 그것이 그렇게 아니꼬울 수 없다. 그렇게 오케스트라 가장 뒤, 가장 밑의 그는 소외감을 느낀다.

연극 '박상원 콘트라바쓰' 공연 사진. 사진=박앤남공연제작소
연극 '박상원 콘트라바쓰' 공연 사진. 사진=박앤남공연제작소

이야기가 진행될 수록 연주자는 자신의 비약함을 드러낸다. 짝사랑하는 여자가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능력있는 연주자들과 어울린다며 슬픈 얼굴을 하고, 어린 시절 받지 못한 부모의 사랑을 읊기도 한다.

상상 속의 상대를 질투하고 스스로를 연민하는 모습에 안타까움이 느껴질 법 한데, 박상원은 연주자가 상투적인 연민의 굴레에 빠지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오히려 음악이 가지는 우아함을 극대화하는 몸짓으로 균형을 맞춘다. 

여기에 브람스, 슈베르트, 말러, 바그너, 베토벤 등의 음악이 더해지며 클래식 공연장을 방불케 한다. 연주자의 말을 빌려 찬양, 비판, 공감, 멸시 등으로 다채롭게 표현되는 '박상원의 클래식 도슨트'는 언제나 콘트라베이스로 끝을 맺는다. 자신을 나약하게 만드는 콘트라베이스이지만, 그것마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인간으로 남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결국 기, 승, 전, 콘트라베이스로 이어지는 대화는 현실에서 쉽사리 벗어날 수 없는 현대인의 자화상을 담아낸다.

​연극 '박상원 콘트라바쓰' 공연 사진. 사진=박앤남공연제작소
​연극 '박상원 콘트라바쓰' 공연 사진. 사진=박앤남공연제작소

이야기의 시작점이 무명의 파트리크 쥐스킨트에게 연극을 제안한 것(기)이라면, 쥐스킨트는 그것을 '콘트라바스'로 완성하고(승), 2020년 박상원이 원작을 모태삼아 6년 만에 연극 무대에 오르는 것(전)에 이어, 마침내 2022년 '박상원 콘트라바쓰'라는 이름으로 관객과 만나며 결론짓는다.

작품은 연주자를 현대로 데려왔을 뿐만 아니라, 원작이 가진 오래된 감수성까지 현대적으로 해석한다. 일부 단어를 삭제해 상황을 모면하는 쉬운 길을 선택하지 않고 직면하되, 배우의 표현에 집중해 세심한 손길로 풀어낸다.

기, 승, 전을 지난 공연은 원작을 사랑하는 현대인도, 원작의 문제점을 꼽는 현대인들도 모두 만족할 만한 결과로 '콘트라바스'를 맺는다.

'박상원 콘트라바쓰'는 오는 30일까지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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